시(詩)

고두현, 팥빙수 먹는 저녁

kimbook 2007. 6. 8. 22:44

팥빙수 먹는 저녁

 

고두현

 

흰 눈가루처럼 백설기처럼

부드러운 얼음이 소복하게 쌓이는 밤

둥근 유리그릇 안에서 그대는

뽀얀 우유와 연한 오렌지 조각 어루만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풀고

 

팥고물처럼 우리 이렇게 달디단 눈빛으로

한 백 년쯤 녹아갈 수 있다면

 

오늘같이 더운 날

이마에 맺힌 땀방울 송글송글 닦아주며

달뜬 마음도 식혀주며

한술한술 서로 입에 넣어주다가

빈 그릇 밑바닥에 얼굴 비춰보면서

시원하지 참 시원하지 다독여주면서

한 그릇 더 시킬까 마음 써주면서

 

오순도순 손잡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 사각사각 눈 내리는 겨울밤까지

이 길 오래오래 이어지길 빌면서

내일 또 내일 내년 후 내년

이 시려 찬 것 더 못 먹는 날까지

손가락 걸고 자박자박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고두현,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문예중앙시선6, 랜덤하우스중앙(2005년 10월 20일 3쇄)---

 

*그래, 오늘 덥더라.

 '달뜬 마음' 식힐 수도 없더라.

 

 손가락 걸지 않아도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아름답게 늙어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