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류외향, 가거라 시절아

kimbook 2007. 6. 17. 13:29

가거라 시절아

 

류외향

 

 내가 내 추억의  가장 안쪽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뜰의

구석진 곳에선 열매가 썩고 있다 사람들은 조금씩 일상을 버리고 생각날

 때마다  일상의 때묻은 연장들을  태웠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을 때까지

태우다  손을 탁탁  털고 갔다 뒤에 남은 연기가  외줄기로 흐른다 마지막

남은 것들은 모두 외줄기다

 

 그리고  나무가  있다   산도  언덕도 아닌 박토를  짚고 끝까지 허리 펴지

못한 나무. 이곳엔  아무것도 반듯한 게 없다 마음 편하다 뿌리의 기억이

질길수록 가지는 크게 흔들린다 바람 불지 않아도 요동친다 요동치면서

자주  부러지고  해 지는 쪽에서  슬픔보다 더  빨리 날아온 새들,  연약한

날개로 내 뺨을  철석철석  쳐댄다 나는  주섬주섬 눈물을 주워들고 뜰로

걸어나간다 진물나는 과육을 베어먹는다 상큼하다

 

 일교차 심한 나날의 비, 나의 생태계 저 홀로 젖는다 내장 속에서 썩어

문드러진 것들, 수챗물처럼 새어나와 비와 함께 흘러간다 그리고 나는

빗속에다  내  내장을 몽땅  내다놓았다  잎새에  맺힌  물방울 하나에도

강물이  보이던  범람의  시절,  시절아,  너는 가거라  나는 남겠다  여기

추억의 빈뜰에서 휘어지고 구부러진 나무들에 기대어 처음으로 달디단

잠을 자며, 나는 남겠다.

 

---류외향, 꿈꾸는 자는 유죄다, 시작시인선 0013, 천년의시작(2002년 10월 30일)---

 

*通過儀禮

 

 나는 늘 늦다.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의례'도 많고...

 

 '외줄기'인

 나는  여기 '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