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이상국, 밤길
kimbook
2007. 10. 7. 22:28
보름달 - 2007년 9월 25일, 국악원 별맞이터에서
밤길
이상국
눈발이 내리는데
고한역에서 청량리행 기차를 탄다
밤차는 무덤처럼 적적하고
또 궁전처럼 화려하다
기차는 덜커덩거리며 강을 건너고
느닷없이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막장 같은 어둠 속에서
면사무소와 붉은 십자가와 작은 마을들이
모닥불처럼 환하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는 한다
길이라는 게 그렇다
초행이긴 하지만 가다보면
언젠가 한 번 간 적이 있는 것 같은 건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서 그럴 게다
칸칸마다 흐린 불빛 속에
어디서 본 듯한 사람들이
더러는 고개를 떨군 채 잠들었고
또 어떤 이들은 이야기로 밤을 헌다
혹은 집 나온 지 꽤 여러 날 된 것처럼
쓸데없이 쓸쓸해하며 지나가는 어둠을 향하여
나는 칸델라 불빛 같은 생각들을 흔들며 간다
기차는 춥다고 가끔 비명을 지르지만
길은 멈추지 않는다
---문학수첩, 2004년 봄호 (No.5), 문학수첩(2004년 2월 20일)---
*'길은 멈추지 않'지만,
내가 기차처럼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많다.
내가 멈추고 싶을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