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年 6月(97)
1.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진태원, 폭력과 시민다움,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 난장(2012년 1월 13일)
---삶이 죽음보다 더 나쁘다는 사실, 그게 아니라면 죽음 자체보다 더 영위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전통적으로 고문의 경험,
따라서 고문당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죽음이라는 '구원'을 내려달라고 간청하게 만드는 고통의 경험, 그런 경험의 강렬함과
'세분화'의 문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삶이 죽음보다 더 나쁘다는 사실은 일종의 운명이라거나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처럼
끝없이 계속되는 폭력의 총합이나 연속성에 준거할 수도 있다.(106쪽)
2.임수현,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문학과지성사(2011년 11월 11일)
---저 이런 생각 자주 해요. 직업이 없다는 건, 생각이 넓고 깊어질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거잖아요.
그래서 일이 없는 사람은 늘 깊은 생각 때문에 이마에 주름이 가득하고, 늘 한곳에 머물러 있는데도,
오랫동안 떠돈 사람보다 더한 객수나 노독 같은 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V를 처음 봤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참 힘들겠구나, 하는 연민 같은 게 생겼어요. 물론 V도 한때 직업 같은 게 있었겠죠.
하지만 V는 늘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무료하고 어색한 일상에 포박돼 살다 보면
포르노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위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겠죠.
텅 빈 방에 들어가기가 겁나 뒷골목을 몇 번씩 어슬렁거리다 욕지기와 어지럼증이 몰려와
허겁지겁 이불 속을 그리워하며 열쇠를 따는 일을 며칠씩 반복했겠죠. 그러다 사직서를 냈거나
무작정 출근하지 않았을 테고, 직장을 나가지 않은 이튿날부터 구직 사이트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을 테지요.
그러다 이내 나날에 익숙해졌을 테고, 어느 순간 정신은 우물처럼 깊어졌을 거예요.(203쪽)
3.김소연 외, 2012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오키나와, 튀니지, 프랑시스 잠, 현대문학(2011년 12월 9일)
4.박형서, 핸드메이드 픽션, 문학동네(2011년 12월 5일)
5.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정현종, 100편의 사랑 소네트(Cien Sonetos de Amor), 문학동네(2011년 4월 11일, 개정판 4쇄)
6.안성호, 누가 말렝을 죽였는가, 문학과지성사(2011년 7월 8일)
7.요시모토 바나나, 요시모토 나라, 김난주, 아르헨티나 할머니, 민음사(2007년 5월 23일, 1판 5쇄)
8.이언 레슬리(Ian Leslie), 김옥진, 타고난 거짓말쟁이들(Born Liars), 북로드(2012년 2월 16일)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훌륭한 예절이라기보다는 자기표현이다.
우리가 느끼지 않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는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해 예절이 필요하다.(8쪽)
9.김연수, 원더보이, 문학동네(2012년 2월 17일, 1판 2쇄)
---거기는 대나무숲이었다. 머리 위쪽에서 바람을 맞은 댓잎들이 차르르 소리를 냈다.
죽순들이 그 소리를 향해 쭉쭉 뻗어가고 있었다. 키 큰 대나무 때문에 하늘은 더 멀어 보였다.(157쪽)
---천국이 없으면, 우리 위에 하늘뿐이라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싶어서.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 됐구나.
죽는 건 그런 것이구나. 이제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이구나. 그제야 나는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던 거지. 그게 1980년 12월의 일이야.(266쪽)
10.한유주,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2011년 12월 30일)
11.한흥섭,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 사문난적(2011년 12월 15일)
12.김이설,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들, 문학과지성사(2010년 3월 11일)
---엄마는 죽는 날 아침까지 헐떡였다. 육체의 고통 앞에서 누구도 인간으로 존재하기란 쉽지 않다.
엄마가 집에서 보낸 마지막 석 달은 짧았지만 극렬한 시간이었다.
엄마는 나를 부둥켜안으며 절규하거나 혹은 침묵했다. 때로는 웃었고, 가끔 울기도 했다.
엄마는, 아래로 혈변과 장 점막에서 나오는 점액을 지렸고 위로는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 게워내곤 했다.
잔인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엄마가 죽어야 했으므로 고통이 찾아올수록 기뻤다.
엄마가 죽던 날도 그랬다. 제발 오늘이길, 간절히 빌었다. 숨소리는 메마르고 거칠었다.
나는 엄마의 발치에 쪼그려 앉아 그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푸, 푹, 푸, 푸욱― 귀울음 때문에
소리가 멈춘 것을 금세 알아차리지 못했다. 엄마는 두 눈을 허옇게 뜨고 있었다.
죽기 전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120~121쪽, '환상통' 中에서)
---그래도 김 팀장이 극단을 인수할 때 나는 남을 수 있었다. 첫 면담 때 그가 가슴을 주무르는 걸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는 성기를 내 입에 넣곤 했다. 거기가 연습실이든, 조명실이든, 화장실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나는 극단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이 되었다.(202쪽, '막' 中에서)
13.장석주, 고독의 권유, 다산책방(2012년 2월 15일)
14.김이설, 나쁜피, 민음사(2009년 6월 12일)
15.김이설, 환영, 자음과모음(2011년 6월 17일)
---나는 좀 전과 달리 수그린 목소리로 남편의 팔을 찾아 그러안았다.
남편이 어색하게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변한 내 목소리가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남편은 어느새 내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했다. 나는 남편을 껴안았다.
"당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셔?"
남편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남편의 머리에서 살비듬 냄새가 났다.
형편이 형편이니 결혼식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뭐라도 이뤄낸 후에 인사하자며
양쪽 집에 알리지도 않고 살림부터 냈다. 남들에게 받는 축복도 탐이 났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더 큰 숙제였다. 세상에 엄두도 못 내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리 엄마도 불쌍해. 나 하나만 믿고 사는 분이니까. 다, 내가 못나서……. 나 때문에 우리 엄마도, 당신 고생만 시킨다."
아는 사람이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참았다. 남편이 팔을 뻗어 가슴을 쥐었다.
아빠. 남편 뒤의 아이가 선잠이 깨어 제 아빠를 불렀다. 응, 응. 얼른 내 몸에서 손을 뗀 남편이 아이를 향해 돌아누웠다.
어두운 방 안에 아이의 가슴을 토닥이는 소리만 들렸다. 남편을 이렇게 날백수로 만들 수는 없었다.
"어머니……. 건강하시지?"
"정정 하시지. 그러니 작업 가서 일도 하고, 내 용돈도 보내주셨지."
나는 똑바로 누웠다. 밖에서 들어온 불빛이 천장에 어른어른 흔들렸다.
"주말에, 어머니 한번 찾아가요."
아이의 가슴팍을 다독이던 소리가 뚝 멈췄다.(64~65쪽)
---준영은 가죽 손가방을 만지작거렸다. 엄마는 어쩌자고 저런 걸 여기까지 불러들였는지. 골치가 지끈거렸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건사할 방법이 없어 엄마를 불러온 것인데. 이건 뜻밖이었다. 준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알았어. 갈게, 간다고. 얼굴 봤으니까 됐어."
준영이 테이블 위로 흰 봉투를 툭 떨어트렸다.
"나도 정신 차렸어. 누나한테 받은 거 다 갚으려면 아직 멀었지만. 병원비에라도 좀 보태."
봉투에는 수표가 여러 장 들어 있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그래도 돈이 싫지 않았다.
도둑고양이 하나가 눈을 번뜩이며 골목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몸을 숨긴 고양이가 가냘프게 울어댔다.
"작은 누나 죽은 건 알아?"
공판장 여자가 슬그머니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뭐? 무슨소리야?"
"뻔한 거 아냐. 돈 때문이지. 정선에서 망가졌어. 한번 발 들이면 끝장이 나야 끝나는 데잖아.
코스대로 간 거야.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몽땅 다 잃고, 사채 들이고, 몸 팔고, 도망치다가 잡힌 모양이야.
그 소굴에서 사람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거고."
나는 준영의 멱살을 잡았다.
"왜! 내 허락도 없이 왜 죽어!"
준영이 담배를 꺼냈다.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동안 내가 보내준 돈은, 내가 별채에서 보낸 시간은! 겨우 그렇게 죽으려고! 허망했다. 민영의 일생이 허망했다.
기운이 빠졌다. 그래도 봉투를 떨어트릴까 봐 손가락을 오므려 힘을 줬다. 동네 놀이터에서 쓰레기를 태우는지 매캐한 냄새가 났다.
너무 매워 그제야 눈물이 났다. 밤하늘에 별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172~174쪽)
16.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2003년 8월 16일, 초판 3쇄)
17.김훈, 黑山, 학고재(2011년 11월 4일, 초판 4쇄)
---마을은 산과 언덕에 기대고 동쪽 물가를 따라서 들어섰고 백성들은 돌담을 높이 쌓아서 집을 감추었다.
담구멍 틈새마다 수평선이 지나갔다. 포구 쪽에서 바라보면 돌담 위로 초가지붕들이 잇달아서 마을은 물고기 비늘 같았다.(83쪽)
---양반에게서는 갓 풀 먹인 모시 적삼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마노리는 코를 벌름거려서 양반의 냄새를 맡았다.
내 몸에서 풍기는 말똥 냄새가 양반의 콧구멍으로 들어가겠거니, 라고 마노리는 짐작했다.
먼 길들의 냄새, 햇볕에 그을린 흙의 냄새를 황사영은 맡고 있었다.(171쪽)
18.김태용, 풀밭 위의 돼지, 문학과지성사(2007년 11월 16일)
---아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아빠를 보면서 죽을 놈이 죽었다는 생각을 했다.(64쪽, 오른쪽에서 세번째 집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