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류휘석, 믿음
kimbook
2020. 3. 28. 22:17
믿음
류휘석
그의 이름을 부른 지 오래되었다 나는 해마다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얼마 전부턴 그도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이 먼저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몸을
가졌고
그것이 그에게는 불리했을 것이다 몇해를 지나오면서도 그가 정확히 어
떤 존재인지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억울해할까 그가 나의 존재를 모를지도 모르지만
무수한 악몽을 지나쳐오면서 단 하나도 기억되는 얼굴이 없다
베개를 뒤집으면 거기에 새 이름과 새 얼굴이 있고
나는 매일 갈아입는다
이것이 일종의 구원이라면 누가 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어디를 올려
다보고 있어야 내민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그의 이름도
그리고 나도
아주 오래된 것만 같다
어디선가 그가 실존하고 있다면
그리고 억울해하고 있다면
어쩐지 기쁠 것 같다
---창작과비평 2020년 봄(통권 187호), 창비(2020년 3월 1일)---
*
어쩐지 기쁘지 않은 봄날이다.
어쩐지 믿지 못할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