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봄날
조명
오늘 같은 날
친정집 뜰팡에 앉아 있으면
대낮에도 달콤한 떨림을 느낄 수 있겠네
명마구리 날아드는 처마 저 멀리
늘 말이 없던 앞산을 내다보면
겨울을 깊은 사색으로 통과한 깡마른 참나무들이
천 개의 눈깔만 키우며 서 있네
그런데, 꼭, 오늘 같은 날이면
길게 속삭이며 봄비가 찾아와선
부드러운 혓바닥으로 타액을 흘리며
참나무 각질 구석구석을 핥아 내리는 것이네
참나무는 움찔움찔 가지를 흔들기도 하고
이따금 푸르르 떨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봄비이거나 참나무로 동화되어 버리네
오늘 같은 날
빈 사무실에 앉아 마른 눈을 감으면
물오른 참나무들이 천 개의 눈깔을 열고
햇이파리를 쏙쏙 내미는 것을
미리 볼 수도 있네
---조명, 여왕코끼리의 힘, 민음의 시 145, 민음사(2008년 2월 15일)---
*어제도 봄날이고,
오늘도 봄날이다.
내일도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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