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668

김기택, 깜빡했어요 깜빡했어요 김기택 저런 저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했네요. 제가 요즘 이렇다니까요. 도대체 뭘 하고 사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 어어, 냄비가 넘치고 있어요, 아니, 그 사람이 제멋대로 넘쳐, 탁자 바닥이, 잠깐만, 넘치는 물부터 잠글게요. ​ 미안해요, 통화하느라 깜빡했어요 물이 넘치는데도 정수기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 전 이런 일이 터질 걸 다 알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그랬잖아요, 그 사람이, 잠깐만요, 지금 마룻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어요. ​ 이건 저만 알고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얘기인데요, 절대로 냄비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돼요. 안 보이는 구석이나 틈으로 흘러 들어가면 곰팡이나 바퀴벌레나 날벌레에게 퍼질 수도 있어요. ​ 이건 당신한테만 .. 2023. 6. 24.
송진권, 소나기 지나가시고 소나기 지나가시고 송진권 그렇지 마음도 이럴 때가 있어야 하는 거라 소나기 한줄금 지나가시고 삽 한자루 둘러메고 물꼬 보러 나가듯이 백로 듬성듬성 앉은 논에 나가 물꼬 트듯이 요렇게 툭 터놓을 때가 있어야 하는 거라 물꼬를 타놓아 개구리밥 섞여 흐르는 논물같이 아랫배미로 흘러야지 속에 켜켜이 쟁이고 살다보면 자꾸 벌레나 끼고 썩기나 하지 툭 타놓아서 보기 좋고 물소리도 듣기 좋게 윗배미 지나 아랫배미로 논물이 흘러 내려가듯이 요렇게 툭 타놓을 때도 있어야 하는 거라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 창비시선 483, 창비(초판 1쇄, 2022년 10월 24일)--- *"벌레나 끼고 썩기나 하"는 날들이 물꼬 튼 논물 같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2023. 6. 23.
이봉환, 엄마가 날 부르신다 엄마가 날 부르신다 이봉환 아이야아이야, 엄마는 요새 자꾸 누군가를 부르신다 어 릴 적의 날 부르시는 겐지 그냥 아무에게나 칭얼대시는 겐 지 무언가가 슬쩍 스치기라도 하면 아야아야, 하고 앓으 신다 똥을 주무르고 주사기도 빼버린다는 전화가 온다 담당 의사 말조차 안 들어서 어찌할 수가 없으니 두 손을 좀 묶 어두면 안 되겠냐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가 엄마 손을 붙잡고 허둥대는데 아이야, 아이야, 느그 집에 가면 안 되겠냐는 엄마의 눈빛 ---이봉환, 응강, 반걸음 시인선 5, 반걸음(초판 2쇄, 2020년 3월 13일)--- *얼마전 치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신 친구가 있다. 그 친구, 매일 밤 운다. 2022. 10. 10.
이은봉, 조촐한 가족 조촐한 가족 이은봉 멀리 풍장 치는 소리 들린다 팔월도 한가위 산마을 아득한 골짜기 저쪽 색동옷 곱게 차려입은 어린아이 둘······ 젊은 엄마를 따라 묏등 앞 오가며 상을 차린다 조촐한 가족, 두 번 절하고 음식 나누는 동안 산까치, 참나무 끝에 날아와 운다 ---이은봉, 생활, 실천문학 시인선 029, 실천문학사(2020년 1월 20일, 1판 2쇄)--- 2022.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