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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김중일, 가문비냉장고

by kimbook 2008. 8. 18.

 가문비냉장고

 

 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독오른  한 마리 산

 짐승처럼  가르릉거린다  더듬이 같은 푸른  털은 공중을

 잡아당긴다 부유하던 얼굴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

 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

 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

 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넣고, 가문비나

 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

 고 문 열고 타박타박 걸어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

 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김중일, 국경꽃집, 창비시선 275, 창비(2007년 4월 20일)---

 

*'가까운 곳에',

 아주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

 

 '가문비냉장고' 같은,

 일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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