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냉장고
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독오른 한 마리 산
짐승처럼 가르릉거린다 더듬이 같은 푸른 털은 공중을
잡아당긴다 부유하던 얼굴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
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
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
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넣고, 가문비나
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
고 문 열고 타박타박 걸어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
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김중일, 국경꽃집, 창비시선 275, 창비(2007년 4월 20일)---
*'가까운 곳에',
아주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
'가문비냉장고' 같은,
일생도 있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흥식, 떠나는 말 (0) | 2008.08.24 |
---|---|
우대식, 무애(無碍)에 관한 명상 (0) | 2008.08.20 |
곽은영, 불한당들의 모험6 - 사랑에 미친 가님 (0) | 2008.08.12 |
김수우, 목련나무 牛舍 (0) | 2008.08.01 |
차창룡, 5월 (0) | 2008.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