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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이규리, 붉은 안개

by kimbook 2010. 5. 13.

붉은 안개

 

이규리

 

1

 

내가 안개를 좀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리무중, 아는 체한 것 가려도 되겠습니까

실언이 많았네요

그 안개로 휘장을 쳐서

내 무지를 좀 가려도 되겠습니까

정말 아픈 사람은 아픈 척하지 않지요

미안해요

내가 죽은 척했던 것

천의무봉 너머를 본 것처럼 말한 것

그러니까 그걸

슬쩍 가려도 되겠습니까

 

2

 

노을, 당신이라는 건더기 건져내고

그걸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한 시대 앞에서 오래 참았던

매운 사상의 국물들

들이켜도 되겠습니까

눈이 발개지도록 너뿐이었다 말해도 되겠습니까

울고 나서 다시 배시시 웃어도 좋겠습니까

그동안

노을을 다 써버려도 괜찮겠습니까

 

3

 

말을 가두니 머리통이 부풀어올랐습니다

아, 아 가만히 소리 하니 기다린 듯

한 소리에 소리가 달라붙어 터질 듯 당겨왔습니다

잠든 사자 수염을 건드린 거죠

아가리를 피하려 눈을 감습니다

웅크린 덩어리, 불안이 꿀꺽 날 삼켰습니다

몇몇의 장면은

넘어가지 못하고 찢어졌는데요

입어보지도 않은 실크블라우스는

눈부신 흰색이었네요

허공이었네요

 

---현대문학, 2010년 5월호(665호), 현대문학(2010년 5월 1일)---

 

*가질 게 없네요.

 

 '안개'도

 '노을'도

 '당신'도

 '말'도

 '허공'도

 '붉은 안개'도

 '매운 사상의 국물'도...

 

 난,

 오늘도

 내일도...

 

 하나도 아프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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