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안개
이규리
1
내가 안개를 좀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리무중, 아는 체한 것 가려도 되겠습니까
실언이 많았네요
그 안개로 휘장을 쳐서
내 무지를 좀 가려도 되겠습니까
정말 아픈 사람은 아픈 척하지 않지요
미안해요
내가 죽은 척했던 것
천의무봉 너머를 본 것처럼 말한 것
그러니까 그걸
슬쩍 가려도 되겠습니까
2
노을, 당신이라는 건더기 건져내고
그걸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한 시대 앞에서 오래 참았던
매운 사상의 국물들
들이켜도 되겠습니까
눈이 발개지도록 너뿐이었다 말해도 되겠습니까
울고 나서 다시 배시시 웃어도 좋겠습니까
그동안
노을을 다 써버려도 괜찮겠습니까
3
말을 가두니 머리통이 부풀어올랐습니다
아, 아 가만히 소리 하니 기다린 듯
한 소리에 소리가 달라붙어 터질 듯 당겨왔습니다
잠든 사자 수염을 건드린 거죠
아가리를 피하려 눈을 감습니다
웅크린 덩어리, 불안이 꿀꺽 날 삼켰습니다
몇몇의 장면은
넘어가지 못하고 찢어졌는데요
입어보지도 않은 실크블라우스는
눈부신 흰색이었네요
허공이었네요
---현대문학, 2010년 5월호(665호), 현대문학(2010년 5월 1일)---
*가질 게 없네요.
'안개'도
'노을'도
'당신'도
'말'도
'허공'도
'붉은 안개'도
'매운 사상의 국물'도...
난,
오늘도
내일도...
하나도 아프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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