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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황병승, 살인마(殺人魔)_Birthday Rabbit

by kimbook 2007. 7. 14.

살인마(殺人魔)_Birthday Rabbit

 

황병승

 

우비를 샀다

이 저녁의 엄마는 다정한 불빛 아래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겠지 누군가의 생일이라서

누굴까, 빨간 눈 솟은 귀 바로 나라는 네발짐승의.

 

막다른 골목에서 느긋하게 우비를 걸치고

탄생을 노래하는 이어폰을 꽂고

나는 처음 마주치는 여자의 뱃속으로 뛰어들었지

여자가 눈을 뒤집고 신음조차 내뱉지 못할 정도로

뱃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잔치를 열었지

 

이 저녁 엄마는 좋은 냄새로 가득한 식탁을 차리고 기다릴 것이다

이제 핏물이 흐르는, 아기 피부 같은 우비는 그만 벗고

선물도 받았겠다

축하해, 라고 말하는 눈빛으로 잠들어서 좋다, 이 여자

뒤로한 채 엄마에게 가야지

기다리다 기다리다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릴.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이길래, 누구? 바로 나라는 네발짐승의.

 

그러나 집 앞에 와서야 나는 늘 깨닫지

불 밝힌 창도 엄마도 근사한 식탁도 없다는 걸

오늘도 당신 없이 생일을 맞았으니 단단히 일러둬야지

엄마 엄마 오늘은 내일은 오늘 말구 내일은

또다시 누군가의 생일......

당신이 눈을 뒤집고 사지를 벌벌 떨던 그 옛날

당신의 캄캄한 뱃속에서 덜컥, 살인의 묘미를 알아버린 아가

차가워진 당신의 몸을 열고 버젓이 태어난 희대의 살인마

누굴까, 빨간 눈 솟은 귀 바로 나라는 네발짐승의.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문예중앙시선4, 랜덤하우스중앙(2005년 6월 30일)---

 

*'차가워진 당신 몸을 열고 버젓이 태어난 희대의 살인마'

 한 명을 알고 있다.

 '심청'이 말고, 심청이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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