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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최규승, 멸치

by kimbook 2007. 7. 25.

멸치

 

최규승

 

마룻바닥에 풀려 있는

햇살이 가물거리는 늦은 오후

국수를 말기 위해

멸치를 넣고 국물을 우려낸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오르락내리락 요동치는 멸치

구수한 국물냄새가 뱃속으로 파고든다

멸치를 한 마리 건진다

퉁퉁 불은 몸뚱어리가 터질 듯하다

맛을 빼앗긴 멸치를 씹으면서

문득,

멸치 같은 나이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어떤 뜨거움 속에 담겼다 나왔을까

 

은빛 물결을 퍼뜨리며 바다를 유영하는

멸치 떼의 까마득한 시간을 퍼올려

삶은 면발 위에 붓는다

냄비 바닥에 남은 멸치들이 막막한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

퉁퉁 불은 시간들을

입에 넣고 씹는다

혀끝은 지난 시간의 맛을 알지 못한다

그 시간을 건너는 동안

바다은 나를 물들이지 못했다

나는 채우지도 못하고 어느새 잃어버릴 나이를 맞는다

죽음은 너무 멀고

욕망의 시간은 가까우나 돌아갈 수 없다

차기도 전에 물이 빠지는 깨진 독처럼

내 몸은 내 나이에 헐겁다

야위어가는 몸

돌아앉은 그녀에게서 파꽃 향기가 난다

 

---최규승, 무중력 스웨터, 시작시인선 0073, 천년의시작(2006년 9월 25일)---

 

*헐거운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아무도 서로를 물들이지 못한다.

 

 一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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