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焚書) 3
김근
선왕께서 한날은, 이제 봄!이라 하시매, 이제 봄!이라
적었나니,
어디서 불려왔는지 모를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궐 안에 시끌시끌 넘쳐났더이다 하나, 꽃처럼은 아니
고 나비처럼만
궁의 뜰을 날아서 연회에까지 불려나와 시끌시끌 신하
들의 귀에
달라붙어 앉았는데 신하들 죄다 귀에서 피를 쏟고 쓰
러졌더이다
선왕께서 한날은, 비로소 봄!이라 하시매, 비로소 봄!
이라 적었나니,
궁궐의 나무란 나무는 모도 꽃 필 자리에 종기를 매달
고 곪고 곪다가
끝내는 툭, 툭, 터져 피고름 온통 질질질 낭자하고 궐
안이 썩은 내로
진동하였으니 어린 내시들의 성기 모조리 잘리고 어린
무수리들
모조리 처녀를 잃고 꼬부랑꼬부랑 하루아침에 늙은 뒤
였더이다
선왕께서 한날은, 시름에 겨워 짐이 봄! 하면 거짓으로
라도 봄일진대
야속고 야속다, 하시며 다시 꽃! 하시매, 다시 꽃!이라
적었나니,
헤아릴 수도 없는 뱀들만 타래타래로 뻣센 비늘마다
꽃을 피워 궐 안에 창궐했더이다
선왕께서는, 그예 광분하시었나니, 그러기가 삼동 휘
몰아치는 눈보라 같았더이다
구중의 담장과 벽 들 꽝꽝 얼어붙어 고드름조차 달리
잖고 불기운도 없는 냉골의 침소에서
온몸에 동상을 입어 쩍쩍 갈라져 터지는 얼굴로 선왕
께서 친히 불러 이르시되,
실록에는 가까스로 봄!이라고만 라고만 기록하라, 가
까스로 하시매,
소신 망극에 망극을 무릅쓰고 그길로 퇴궐하여 이날
입때것 필경사로나 떠돌았사온데,
한 이른 봄 들리는 풍문에 실록이야 씌어지기가 부지
하세월인데 선왕께서는, 시푸르뎅뎅
산송장으로다만 가까스로 봄! 이라고만 라고만, 얼음
게워내며 지껄이고 지껄이신다 하였더이다
---김근,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창비시선 293, 창비(2008년 9월 25일)---
*가까스로...
가까스로...
나는 '뭐'라고 지껄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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