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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김근, 분서(焚書) 3

by kimbook 2009. 1. 6.

분서(焚書) 3

 

김근

 

 선왕께서 한날은, 이제 봄!이라 하시매, 이제 봄!이라

적었나니,

 어디서 불려왔는지 모를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궐 안에 시끌시끌 넘쳐났더이다 하나, 꽃처럼은 아니

고 나비처럼만

 궁의 뜰을 날아서 연회에까지 불려나와 시끌시끌 신하

들의 귀에

 달라붙어 앉았는데 신하들 죄다 귀에서 피를 쏟고 쓰

러졌더이다

 선왕께서 한날은, 비로소 봄!이라 하시매, 비로소 봄!

이라 적었나니,

 궁궐의 나무란 나무는 모도 꽃 필 자리에 종기를 매달

고 곪고 곪다가

 끝내는 툭, 툭, 터져 피고름 온통 질질질 낭자하고 궐

안이 썩은 내로

 진동하였으니 어린 내시들의 성기 모조리 잘리고 어린

무수리들

 모조리 처녀를 잃고 꼬부랑꼬부랑 하루아침에 늙은 뒤

였더이다

 선왕께서 한날은, 시름에 겨워 짐이 봄! 하면 거짓으로

라도 봄일진대

 야속고 야속다, 하시며 다시 꽃! 하시매, 다시 꽃!이라

적었나니,

 헤아릴 수도 없는 뱀들만 타래타래로 뻣센 비늘마다

꽃을 피워 궐 안에 창궐했더이다

 선왕께서는, 그예 광분하시었나니, 그러기가 삼동 휘

몰아치는 눈보라 같았더이다

 구중의 담장과 벽 들 꽝꽝 얼어붙어 고드름조차 달리

잖고 불기운도 없는 냉골의 침소에서

 온몸에 동상을 입어 쩍쩍 갈라져 터지는 얼굴로 선왕

께서 친히 불러 이르시되,

 실록에는 가까스로 봄!이라고만 라고만 기록하라, 가

까스로 하시매,

 소신 망극에 망극을 무릅쓰고 그길로 퇴궐하여 이날

입때것 필경사로나 떠돌았사온데,

 한 이른 봄 들리는 풍문에 실록이야 씌어지기가 부지

하세월인데 선왕께서는, 시푸르뎅뎅

 산송장으로다만 가까스로 봄! 이라고만 라고만, 얼음

게워내며 지껄이고 지껄이신다 하였더이다

 

---김근,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창비시선 293, 창비(2008년 9월 25일)---

 

*가까스로...

 가까스로...

 

 나는 '뭐'라고 지껄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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