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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by kimbook 2013. 10. 21.

 

정일근

 

아침에 끓인 국이

저녁에 다 쉬어버렸다

냄비뚜껑을 열자

훅하고 쉰내가 덮친다

이 기습적인, 불가항력의 쉰내처럼

남자의 쉰이 온다

일상의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던 시간의 게릴라가

내 몸을 무장해제 시켜놓고

나이를 묻는다

이목구비 오장육부

나와 함께 사는 어느 것 하나

나이보다 뒤처져서

천천히 오지 않는다

냄비에 담긴 국을

다 쏟아버렸지만

사라지지 않는 쉰내

냄비를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쉰내

이미 늦었다

나의 생은 부패를 시작했다

내 심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빠르게 빠르게.

 

---정일근, 방!, 서정시학 서정시 118, 서정시학(2013년 5월 10일, 초판 2쇄)---

 

*20대부터

 내 정신은 부패를 시작했다.

 대갈통에서부터 온몸으로...

 

 처참하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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