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정일근
아침에 끓인 국이
저녁에 다 쉬어버렸다
냄비뚜껑을 열자
훅하고 쉰내가 덮친다
이 기습적인, 불가항력의 쉰내처럼
남자의 쉰이 온다
일상의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던 시간의 게릴라가
내 몸을 무장해제 시켜놓고
나이를 묻는다
이목구비 오장육부
나와 함께 사는 어느 것 하나
나이보다 뒤처져서
천천히 오지 않는다
냄비에 담긴 국을
다 쏟아버렸지만
사라지지 않는 쉰내
냄비를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쉰내
이미 늦었다
나의 생은 부패를 시작했다
내 심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빠르게 빠르게.
---정일근, 방!, 서정시학 서정시 118, 서정시학(2013년 5월 10일, 초판 2쇄)---
*20대부터
내 정신은 부패를 시작했다.
대갈통에서부터 온몸으로...
처참하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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