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오르던 키 큰 나무
고진하
모처럼 찾아온 머리칼이 반백인 친구는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푸념만 잔뜩 늘어놓고 갔다.
저 반백의 머리칼이 백발로 변해 갈 때
나도
그런 푸념 주절주절 늘어놓게 될까.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생의 미로 앞에서
어떤 나침반도 밝은 길눈이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어류(發光魚類)도 아니면서
무의식의 바다, 그
수심도 모른 채 뛰어들어야 하는
심연(深淵)으로의 잠수,
그게 삶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끔씩 마주친 눈빛에서는
그런 푸념이 거친 눈발처럼 쏟아지곤 했다.
쓸쓸한 걸음새로 돌아서는 친구를
대문 밖까지 배웅하고 나서
티브이를 켜니,
산더미 같은 지진해일에 쫓기는
한 남자가 키 큰 나무 위로 허겁지겁 기어오른다.
화급한 장면은 거기서 뚝 끊기고
화면이 획 바뀌었는데
그 남자도 그 장면도 낯설지 않다.
영혼의 수심 깊은데서
지각(地殼)이 요동치는지도 모르고 허둥거린 것이
어디 저 남자뿐이던가.
푸념만 늘어놓고 친구가 앉았다 간 빈 자리에
그 남자가 오르던 키 큰 나무 한 그루
환영처럼 서 있는 것을 본다.
---고진하, 수탉, 민음의 시 130, 민음사(2005년 12월 16일)---
*나의 영혼은 수심이 얕은가 보다.
삶에 대해서 푸념조차 늘어놓지 못했으니.
나는 늘 '키 큰 나무'가 그립다.
그날, '쓰나미'에 추월 당하던
내 '생(生)'은
또, 얼마나 발버둥치며 쓸어졌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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