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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남진우, 석모도 해변을 거니는 검은 개 한 마리

by kimbook 2007. 6. 10.

석모도 해변을 거니는 검은 개 한 마리

 

남진우

 

눈보라가 걷힌 해변

저 멀리 검은 개 한 마리가 어정거리고 있다

낭떠러지 아래 푸석한 갯벌을 가로질러 펼쳐진 바다

사는 것이 끝없는 모욕의 연속일 때 문득 눈보라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고 싶을 때

늘 귓가에 철썩이는 파도

바닷물에 앞발 담그기도 두려운 듯 야윈 개는 멀찍이 떨어져

수평선으로 향하는 몇 갈래 물 위의 길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미워했던 것들 이젠 다 부질없다

까슬한 턱을 쓰다듬으며 마른기침을 해보지만

가시를 곤두세운 바람이 쓸고 가는 지상엔

아침 햇살에 흩날리는 자디잔 먼지 조각들 뿐

눈 가늘게 뜨고

개 한 마리 모래 둔덕을 넘어

낭떠러지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아무런 영광도 없이,

물거품처럼 부서지고 싶은 회한도 없이,

늠름하게, 천천히, 꼬리를 늘어뜨리고

석모도 아침 해변을 산책하는

검은 개 한 마리

 

---남진우,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문학과지성시인선 321, 문학과지성사(2006년 8월 4일)---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미워했던 것들 이젠 다 부질없다'

 

 오늘도 우리집 골목에서는 '개똥'을 밟고

 '늠름하게, 천천히, 꼬리를 늘어뜨리고'

 '아침 해변을 산책하'듯 출근한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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