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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박후기, 목련 外 1

by kimbook 2007. 6. 10.

목련

 

박후기

 

한 사내가 진다

네거티브 필름 속

시들어가는 폐 한쪽이 목화 이불솜 같던

창백한 사내의 낯이 툭, 길 위에 떨어진다

알전구 같은

백목련 꽃봉오리에 내려앉은 햇살이

필라멘트처럼 떨고 있다

필름 속 세상은 깊고도 어두워

오히려 상처가 환하게 빛난다

부서진 문짝이 바람에 넘어가듯

와락, 꽃의 시공(時空)이 열리고,

사내의 꿈은 오래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목련은 너무 일찍 화촉을 끈다

속절없이 사그라지는 가여운 향기

지상에 남겨진 사내의 여자가

타들어간 향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고뇌 속을 가다*가 관 속에 펼쳐지고

들린 관짝에 매달린

사내의 늙은 아버지가 소처럼 울먹인다

 

벽제 시립 화장터

막 이승을 지나온 장의차가 저승 문턱에 걸려

덜커덕, 시동 꺼지는 소리 들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화구 속에 죽은 사내 혼자 남겨두고

천천히 그러나 재빨리 국수 한 그릇 말아 먹고

죽은 사내 생각하며 이 쑤실 때,

바람을 걸쳐 입은 촛불처럼

누군가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린다

저 불타버린 성냥골처럼 가느다란 뼈는 아마도

사내의 따뜻한 심장을 감싸주었던 늑골이었을까

뼛가루 한 줌씩 움켜진 채

사람들 흩어지고

사내도 흩어진다

 

살아남은 자들은 개미처럼 줄지어

해마다 학사주점 왕개미집으로 2차 가고

개미처럼 뒤돌아보며 다시 흩어지고

내년에 다시 보자고,

잘 가, 외마디 소리에

뉘 집 목련이 떨어진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소설.

 

*'한사내가 진' 일을 기억한다.

 

 '상처가 환하게 빛'나는 것도 안다.

 

 '왕개미집'으로 개미처럼 줄지어 드나든 기억도 있다.

 

 지하로 내려간 '왕개미집',

 '여왕개미'가 교체된 후 가본 적이 없다. 

 

 나도 목련처럼 떨어졌다.

 

 

소름

 

 야산 중턱, 누군가 아카시아나무의 허리를 반쯤 못 되게

자르다 말았다. 톱질을 하다 그만둔 것인데, 바람 불 때마

다 아카시아나무 가늘게 터진 입 굳게 다물고 어금니에

힘주는 소리 들린다. 가지마다 소름처럼 가시가 돋았다.

 

---박후기,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실천문학의 시집 159, 실천문학사(2006년 3월 25일)---

 

*나의 소름은 가시처럼 돋지 못하고

 나는 쓸데 없는 곳에서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가지'에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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