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

이현승, 인정도 사정도 없이, 현대문학(2014년 11월 26일)

by kimbook 2015. 8. 30.

인정도 사정도 없이

 

이현승

 

누가 나를 좀 때려줬으면 좋겠다.

누가 여기서 좀 꺼내주었으면 싶다.

 

아무리 재난이 이웃사촌 회갑처럼 잦은 조국이지만

나 치매 걸리면 조용히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배우자처럼

죄송의 말이 재앙보다 더 잔인하게 들린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사람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빨래처럼 쥐가 나고 몸이 꼬이듯

맞은 뺨을 어루만지면 우리가 깨어날 때

 

마치 평평한 바닥을 딛고 추락을 예견하듯

결국 불안을 일깨우는 건 안도이다.

 

왜 나빴던 기억은 영원한 걸까.

우리는 극복 가능하지만

거기서 나갈 수는 없다. 영원히.

터널과 터널 사이 구간의 운전자처럼

백일에 눈이 아프다.

 

겉은 젖고 속은 타들어가는 이곳에서

지금 살아 있다는 것보다 끔찍한 재앙은 없다.

차라리 누가 나를 좀 때려주었으면 좋겠다.

누가 용서라는 말을 없애버리면 좋겠다.

 

---이기성 외, 2015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굴 소년의 노래 외, 현대문학(2014년 11월 26일)---

 

*정말로 오늘 같은 날이라면

 '용서라는 말을 없애버리면 좋겠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병승, 어머니는 걷는다  (0) 2015.10.24
이현호, 개벚나무 아래서  (0) 2015.09.10
윤제림, 수몰(水沒)  (0) 2015.07.14
김륭, 엄마 생각 -달밤  (0) 2015.07.13
이향, 새끼손가락  (0) 2015.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