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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김기택, 깜빡했어요

by kimbook 2023. 6. 24.

깜빡했어요

 

김기택

 

저런 저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했네요.

제가 요즘 이렇다니까요. 도대체 뭘 하고 사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어어, 냄비가 넘치고 있어요, 아니, 그 사람이

제멋대로 넘쳐, 탁자 바닥이, 잠깐만,

넘치는 물부터 잠글게요.

미안해요, 통화하느라 깜빡했어요

물이 넘치는데도 정수기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전 이런 일이 터질 걸 다 알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그랬잖아요, 그 사람이,

잠깐만요, 지금 마룻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어요.

이건 저만 알고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얘기인데요,

절대로 냄비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돼요.

안 보이는 구석이나 틈으로 흘러 들어가면

곰팡이나 바퀴벌레나 날벌레에게 퍼질 수도 있어요.

이건 당신한테만 하는 얘기니까 안 들은 걸로 해주세요.

지금 닦고 있는 중이니까요.

냉장고 밑으로 흘러 들어간 말까지 다 닦고 있어요.

깜빡했어요, 통화 중에는 말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입을 조금만 더 크게 벌려보세요.

걸레로 닦아야 해요, 이빨 사이랑 사랑니 안쪽까지도요.

어제 빨아서 입보다는 깨끗해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어요.

그렇다고 넘치기까지 할 건 뭐에요.

당신한테만 얘기했는데도 벌써 마룻바닥이 흥건해요.

깜빡했어요, 제가 그런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정수기가, 물이, 아니 말이.

네네, 걱정 마세요, 지금 입에 주워 담고 있는 중이에요.

 

---김기택, 낫이라는 칼, 문학과지성 시인선 573, 문학과지성사(2022년 9월 27일)---

 

*언젠가부터 높은 분이 하시는 말씀을 

  어느 정도 높은 분들이 이해를 못하시는 걸 보면

  높으신 분의 말씀이 넘쳐 흘러서 그런가요?

 

그게 아니라면

 '수능'에

 '킬러문제'가 아니라 '킬러두목문제'도 많이 출제해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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