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했어요
김기택
저런 저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했네요.
제가 요즘 이렇다니까요. 도대체 뭘 하고 사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어어, 냄비가 넘치고 있어요, 아니, 그 사람이
제멋대로 넘쳐, 탁자 바닥이, 잠깐만,
넘치는 물부터 잠글게요.
미안해요, 통화하느라 깜빡했어요
물이 넘치는데도 정수기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전 이런 일이 터질 걸 다 알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그랬잖아요, 그 사람이,
잠깐만요, 지금 마룻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어요.
이건 저만 알고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얘기인데요,
절대로 냄비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돼요.
안 보이는 구석이나 틈으로 흘러 들어가면
곰팡이나 바퀴벌레나 날벌레에게 퍼질 수도 있어요.
이건 당신한테만 하는 얘기니까 안 들은 걸로 해주세요.
지금 닦고 있는 중이니까요.
냉장고 밑으로 흘러 들어간 말까지 다 닦고 있어요.
깜빡했어요, 통화 중에는 말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입을 조금만 더 크게 벌려보세요.
걸레로 닦아야 해요, 이빨 사이랑 사랑니 안쪽까지도요.
어제 빨아서 입보다는 깨끗해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어요.
그렇다고 넘치기까지 할 건 뭐에요.
당신한테만 얘기했는데도 벌써 마룻바닥이 흥건해요.
깜빡했어요, 제가 그런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정수기가, 물이, 아니 말이.
네네, 걱정 마세요, 지금 입에 주워 담고 있는 중이에요.
---김기택, 낫이라는 칼, 문학과지성 시인선 573, 문학과지성사(2022년 9월 27일)---
*언젠가부터 높은 분이 하시는 말씀을
어느 정도 높은 분들이 이해를 못하시는 걸 보면
높으신 분의 말씀이 넘쳐 흘러서 그런가요?
그게 아니라면
'수능'에
'킬러문제'가 아니라 '킬러두목문제'도 많이 출제해야 할 것 같아요.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진권, 소나기 지나가시고 (0) | 2023.06.23 |
---|---|
이봉환, 엄마가 날 부르신다 (1) | 2022.10.10 |
이은봉, 조촐한 가족 (0) | 2022.10.10 |
이영주,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0) | 2022.10.10 |
김찬곤, 그 자리 (0) | 2022.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