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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유강희, 감자 심는 여자

by kimbook 2007. 6. 17.

감자 심는 여자

 

유강희

 

쭈그렁 젖이 밭고랑 위에

닿을락말락 앉은걸음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여자 혼자 이른 아침 씨감자를 심고 있다

 

밭은 도랑과 무논 사이에 길다랗게 누워 있어서

신의 오래된 노트처럼 움푹 팬 줄이 그어져 있다

더이상 젖이 나오지 않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칼자국 선명한

씨감자를 흙의 속살에 묻는 일뿐이라는 듯

둥근 소쿠리 속으로 들어가는 손이

마른 논에 드는 물처럼 경건하다

 

여자가 처음 아기를 낳아 젖을 물리듯

그 일에만 정신이 팔려 허리를 질끈 밝고 가는

공중의 새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조각젖을 빨아먹는 붉은 밭아기를

저녁 무렵 찔레나무가 부은 발등을 씻는 도랑이 벌써 자장가부터 불러준다

 

감자밭 옆 겨우내 서 있던 감나무 두어 그루도

새의 부리 같은 초록 눈망울을 막 뜨기 시작한다

붉은 흙 속의 씨감자가 궁금해서, 아기에게 서늘한 그늘이라도 깔아주고 싶어서

 

가만히 밭 옆을 지나며 나도 잠시

생각에 잠겨 숨소리도 쌔근쌔근한 그곳을 만져본다

화들짝, 뜨거운 상처가 우물보다 깊다

 

그렇다면 난 또 누가 이 세상에 심어놓은 씨감자인가

이 후미진 고랑에 어떤 꽃 피우고 싶은가

 

---문학동네 2006 가을호(48호), 문학동네(2006년 8월 8일)---

 

*감자 씨눈을 도려낸 걸 본 적이 있다.

 씨눈을 도려낸 감자의 몸뚱이를 본 적이 있다.

 

 어떤 씨눈은 '우물보다 깊'어서

 오래전 인연을 접은 한 여자의 눈을 닮았다.

 

 감자밭 주위에 모여 사는

 '감나무, 도랑, 찔레나무, 무논'

 그리고

 '감자 심는 여자'가 있는 곳.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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