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심는 여자
유강희
쭈그렁 젖이 밭고랑 위에
닿을락말락 앉은걸음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여자 혼자 이른 아침 씨감자를 심고 있다
밭은 도랑과 무논 사이에 길다랗게 누워 있어서
신의 오래된 노트처럼 움푹 팬 줄이 그어져 있다
더이상 젖이 나오지 않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칼자국 선명한
씨감자를 흙의 속살에 묻는 일뿐이라는 듯
둥근 소쿠리 속으로 들어가는 손이
마른 논에 드는 물처럼 경건하다
여자가 처음 아기를 낳아 젖을 물리듯
그 일에만 정신이 팔려 허리를 질끈 밝고 가는
공중의 새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조각젖을 빨아먹는 붉은 밭아기를
저녁 무렵 찔레나무가 부은 발등을 씻는 도랑이 벌써 자장가부터 불러준다
감자밭 옆 겨우내 서 있던 감나무 두어 그루도
새의 부리 같은 초록 눈망울을 막 뜨기 시작한다
붉은 흙 속의 씨감자가 궁금해서, 아기에게 서늘한 그늘이라도 깔아주고 싶어서
가만히 밭 옆을 지나며 나도 잠시
생각에 잠겨 숨소리도 쌔근쌔근한 그곳을 만져본다
화들짝, 뜨거운 상처가 우물보다 깊다
그렇다면 난 또 누가 이 세상에 심어놓은 씨감자인가
이 후미진 고랑에 어떤 꽃 피우고 싶은가
---문학동네 2006 가을호(48호), 문학동네(2006년 8월 8일)---
*감자 씨눈을 도려낸 걸 본 적이 있다.
씨눈을 도려낸 감자의 몸뚱이를 본 적이 있다.
어떤 씨눈은 '우물보다 깊'어서
오래전 인연을 접은 한 여자의 눈을 닮았다.
감자밭 주위에 모여 사는
'감나무, 도랑, 찔레나무, 무논'
그리고
'감자 심는 여자'가 있는 곳.
그립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형건, 입김 (0) | 2007.06.17 |
---|---|
최두석, 길 (0) | 2007.06.17 |
김소연,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수많은~~~ (0) | 2007.06.17 |
오규원, 저기 푸른 하늘 안쪽 어딘가 많이 곪았는지 흰~~~ (0) | 2007.06.17 |
최영철, 동행 (0) | 2007.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