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수많은 그를 수장하고 돌아선 바다 보러 가야겠다
내 눈물로 그 수위를 높였던 동해 바다에 가야겠다 먹장구름 삼키며 사나
운 파도가 나를 삼키며 나는 세상를 삼키며 세월을 물쓰듯 썼던 그 시절들
보러 가야겠다
김소연
내가 신화 속에 존재할 먼 미래에 대해 궁리하다가, 나는 미래를 발길로 찼고 현재
와 결별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생소한 창밖 응시하다보면, 고스란히 실내를 되
비추는 창이 보이고 그곳엔 내가 허공의 실내에 화분처럼 놓여 있기도 하다 멀리 한
줄로 세워진 아파트 불빛이 보인다 이 빠진 불빛 한 군데가 마저 줄을 채운다 거기
사람이 왔나보다 여기도 사람이 있다
창문을 흔들어대는 낯설고 억센 바람, 그, 억센 손아귀와 싸우다 실내에서 지쳐버린
이 영혼 하얗게 타고 있다 가벼운 입김에도 휙, 흩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온 청춘을
저속하고 불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거적 같은 몸뚱이를 아무데나 두고 자버렸
고 내키는대로 아무 꿈이나 불러들여 가위눌렸었고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헌 집처럼
오래오래 나를 비워두웠었다 때가 온 것인가, 선회하는 멸망이 보이고 아주 달게 저
무는 세기말이 보이고 나는 늙어가기보다는 꺾여가고 있음을, 헐렁헐렁한 제스처로
변두리 골목을 어슬렁대고 있음을, 세상의 가십거리를 들어주다 내뱉은 욕설에 뚝
뚝 부러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기분 좋고 바람직한 일이 되어버렸다
공명되는 악기보다 더 비었으면 비었지, 싶은 마음들이 백화점 세일 축제에 붙들린
풍선으로 매달려 있고, 아직 세상에 내건 문패가 없음과 그 문패가 마모될, 마모되어
다 지워질 세상에 대해 나는 기립 박수를 보냈고, 가장 좋은 것에 대해서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은 채 내가 하루, 하루를 살라내고 있음을, 꿰매 입지 않고 찢어 입는
시대에 태어났음을, 뒷산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약수 행렬의 야호, 를 점호로 삼는
야행성들이 컴퓨터 통신 대화방에서 불개미처럼 득실거리고 있음을 못내 만족스러
워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여어, 우리는 전통이란 허깨비의 발뒤꿈치를 잠시
보았을 뿐, 그 허상을 숭배한 한때는 우리 인생의 양념이었을 뿐, 우리는 역사를
배반하기는커녕 구경조차 못 했으니 현실과는 자연스럽게 결별하는 것임을
내 삶의 목적은 천년 동안 잠을 자는 것, 나의 수면은 시대에 대한 예의이며 자비
이다 사나운 파도가 지형을 바꾸며 나의 수면을 깨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훼손할
것을 꿈꾼다
---김소연, 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92, 문학과지성사(1996년 12월 10일)---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그 바다에 가면
훼손되지 않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있다.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강릉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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