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

이창수, 불구경

by kimbook 2011. 9. 19.

불구경

 

이창수

 

숭례문이 불타던 날

흑석동 옥탑방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서 금방 끌 거라고 믿었다

별일 없을 거라고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옛 애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숭례문이 무너지는 모습을 티브이를 통해 보았다

아랫도리에서 손을 빼고 양동이를 들고 나서야 했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용산에 불이 났다

티브이를 통해 불구경했다

여섯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다시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식어버린 과거의 일들을 더듬었다

비겁하다고 자책하면서도

아랫도리에서 손을 빼지 못했다

 

사는 게 그랬다

 

---이창수, 귓속에서 운다, 실천시선 192, 실천문학사(2011년 6월 27일)---

 

*나도 불구경 참 많이 했다.

 

 나도 '사는 게 그랬다'.

 

 사는 게 늘 치욕이다.

 

*100쪽, 詩 "공터" 중 3行

 '꺾긴 자목련'은 '꺾인 자목련'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종길, 부음란  (0) 2011.09.25
송진권, 그 저녁에 대하여 못골 19  (0) 2011.09.21
박소유, 자줏빛 紫  (0) 2011.09.16
유안진, 소금호수  (0) 2011.09.10
유홍준, 버드나무집 女子  (0) 2011.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