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엔 빨갱이가 너무 많다
정한용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근자에 '백성연대'라는 싸가지 없는 이적 단체가
적과 내통하여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힌 낌새가 포착된 고로
이조 참판이 감찰부에 직접 하명하여
관련자들을 모조리 주리를 틀어 책문하였는데
이 지독한 것들이 구린내만 피울 뿐 이실직고를 하지 않는 고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지 않게 방책을 세워야 할 줄 사료되오며
이 역적들이 다시는 준동하지 못하게 내쳐야 할 줄 아뢰오며
하여 정황 증거를 근거로 빨갱이로 몰아 병법으로 처리하고자 하오니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적 행위를 일거에 처단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시위하고자
빨갱이에게 빨간 옷을 입혀 저잣거리에 끌고 다녔사온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백성들이 이를 최신 유행이라 여기고
축구 응원을 핑계로 모두 빨간 옷을 입고 길거리를 나다니고 있사온즉
'빨간 도깨비'라는 배후 세력이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바
이는 종묘사직에 큰 위해가 될까 적잖이 심려되오며
하여 '세계축구잔치본부'에 정식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항의하고
그래도 안 되면 우리나라에서만이라도 축구를 영원히 금지하고자 하오니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더 깊이 내밀히 뒷구멍을 캐 본 결과 빨갱이의 내력이 생각보다 뿌리 깊어
일찍이 8년 전 남대문 앞 큰 마당을 가득 메웠던 응원대들이
"빨갱이가 되라"고 은밀히 외쳤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4년 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빨갱이들 함께 가라"고 부추기더니
작금에 이르러서는 "우리 모두는 빨갱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다 하니
이제 온 나라에 빨갱이가 넘쳐 나는 통탄스러운 지경에 이른즉
하여 앞으로 빨간 내복, 빨간 고추장, 빨간 피 흘리는 것 모두 금지하고
전하와 대신들이 모두 즐기는 하늘색으로 바꾸려 하오니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경이 지금 뭐라 카는지, 내 귀엔 통, 이명밖에 안 들리는디.
---정한용, 유령들, 민음의 시 176, 민음사(2011년 8월 5일)---
*봄비가 뭐라 카긴 카는데
내 귀엔 통, '이명밖'에 들리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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