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

고은, 소원

by kimbook 2012. 2. 21.

소원

 

고은

 

제주도 삼년생 똥도야지가 똥 먹고 나서 보는 멍한 하늘을 보고 싶으오

두어달 난

앞집 얼룩강아지 새끼의 빠끔한 눈으로

어쩌다 날 저문 초생달을 보고 싶으오

 

지지난 가슬 끝자락 추운 밤 하나

다 샌 먼동 때

뒤늦어 가는 기러기의 누구로

저기네

저기네

내려다보는 저 아래 희뿜한 잠 못 잔 강물을 보고 싶으오

 

그도 저도 아니고

칠산바다 융융한 물속의 길찬 가자미 암컷 한두분

그 평생 감지 않은 눈으로

조기떼 다음

먹갈치떼 지나가는 것 물끄럼 말끄럼 보고 싶으오

 

폭포나 위경련으로 깨달은 바

 

너무나 멀리 와버린

내 폭압의 눈 그만두고

삼가 이 세상 한결의 짐승네 맨눈으로

예로 예로 새로 보고 싶으오

 

거기 가 있다가 천년 뒤에나 오고 싶으오

 

---고은, 창작과비평 2012년 봄호(통권 155호), 창비(2012년 3월 1일)---

 

*나,

 깨달은 바 없다.

 

 나,

 소원도 없다.

 

 나,

 '거기' 갈 수만 있다면 영원히 오고 싶지 않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한용, 우리나라엔 빨갱이가 너무 많다  (0) 2012.03.17
이홍섭, 청단풍 아래  (0) 2012.02.23
김규린, 빈손 흐르는 강  (0) 2012.02.20
이지호, 돼지들  (0) 2012.02.19
심언주, 수종사 삽살개처럼  (0) 2012.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