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668 이영주,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이영주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 차갑고 투명한 살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쓸어보지 않고서는 1년 동안 너는 바닷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 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 죽음을 깨우지 못한대 너는 묘지도 없이 잠 속에서 이를 갈며 떨고 있다 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 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 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532, 문학과지성사(초판 5쇄, 20.. 2022. 10. 10. 김찬곤, 그 자리 그 자리 김찬곤 5학년 때 바둑 방과후 가고 싶지 않을 때 바둑 끝나고 영어 학원 가기 싫을 때 영어 끝나고 수학 학원 가기 싫을 때 그때마다 나는 호수 공원 벚꽃나무 벤치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제 그곳을 지날 때였다. 한 아이가 그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김찬곤, 정연주, 짜장면이 오면, 상상의힘 동시집 7, 상상의힘(1판 1쇄, 2019년 1월 20일)--- *그 아이, '고광근'이다. 아니다. '유재만'이다. 2022. 4. 26. 유병록, 망설이다가 망설이다가 유병록 움직이면서도 늘 그 자리인 그네처럼 흔들리다가 봄은 가고 여름이 와요 그 여름에 당신은 없어요 망설이지 말라고 말해주는 당신은 없어요 나는 또 그네에 앉아 가만히 있어요 망설이는 건 자꾸 멍청이 같아서 사람을 놓치고 기회가 지나갈 때까지 머뭇거리고 사랑을 빼앗기지만 망설이는 건 가끔 설탕처럼 달아서 걱정도 사라지고 후회도 멀어지고 저절로 많은 일이 없어지고 그네에 앉아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내가 무었을 망설이는지도 모르다가 가을이 올 거예요 그 가을에 당신은 없을 거예요 망설이지 말라고 말해주는 당신은 없을 거예요 우리 무관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그네와 나만 흔들리고 있을 거예요 ---유병록,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시선 450, 창비(초판 1쇄, 2020년 10월 12.. 2021. 10. 1. 이상국, 유월의 이승 유월의 이승 이상국 아내의 생일을 잊어버린 죄로 나는 나에게 벌주를 내렸다. 동네 식당에 가 고기 몇점 불판에 올려놓고 비장하게 맥주 두병에 소주 한병을 반성적으로 그러나 풍류적으로 섞어 마시며 아내를 건너다보았다. 그이도 연기와 소음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승에서는 더 이상 데리고 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상국,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시선 456, 창비(초판 1쇄, 2021년 3월 30일)--- *不出이다. 부럽다. 2021. 9. 4. 이전 1 2 3 4 5 ··· 16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