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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서상영, 나의 병실

by kimbook 2007. 6. 9.

나의 병실

 

서상영

 

세숫대야에 떨어지는 붉은 코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녀처럼

봄은 왔다, 나의 병실로

너무도 화사하게 봄은 왔다

 

지난 겨울은 지독히 딱딱하여

어떤 아픔도 감히 깨물 수가 없었다

하얀 공간의 뼈가 검은 밤 내내

몰아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겨울은, 맘을 삭이는

여자처럼 둥글게 쓰러졌다

 

그렇게 봄은, 나의 병실로

울고 있는

겨울의 뒷모습으로 왔다

 

병실을 청소해야지, 묵은 약과

두꺼운 일기를 걷어내어

나의 병이 편안해질 수 있도록

웃자란 슬픔의 가지도 잘라내고

작은 병에선 풀씨들을 풀어놓아

나의 병이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도록

 

너무도 화사하게 봄은 왔다

 

---서상영, 꽃과 숨기장난, 문학과지성 시인선 317, 문학과지성사(2006년 4월 28일)---

 

*봄은 갔다.

'웃자란 슬픔의 가지'를 자르기도 전에

'여자처럼 둥글게 쓰러진'건 바로 나다.

나는 또다시 병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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