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길의 푸른 습기
이승원
밤이 산책을 제안했다
소용돌이 같은 검은 웅덩이에 바늘이 내려졌다
나는 부름에 응답했다
가지마다 전구를 감아 빛나는 호텔 정원수들과
치과 의원 건물을 뒤로하고
즐비한 저택들 사이를 내려갔다
처음 오는 택시 기사들이 놀라거나 분노하는 길을
그들은 대개 이곳에 누가 사는가를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외교관저 의경들은 아그리파 두상의 표정을 가졌다
밖으로 나오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샴푸 냄새가 다가왔다
가끔 자동차가 망설이며 질주했다
갈림길에는 눅눅하고 서늘한 빈집이 있었다
그곳은 이십 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다
저택의 노란 불빛에 빈집의 푸른 암흑에
다리는 침대를 찾아 흔들렸다
경비 초소는 모퉁이마다 있었지만 경비원은 보이지 않았다
이정표처럼 환한 소음과 반짝이는 간판들이 나타났다
소방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리는 언제나 밤을 거세하며 흘러갔다
나는 잠 속에서 다른 길이 될 수 없었고
꿈꾸는 동안 나이를 먹었다
---이승원, 어둠과 설탕, 문학과지성 시인선 314, 문학과지성사(2006년 3월 10일)---
*나는,
꿈꾸지도 못하고,
나이만 먹었다.
내리막길만 달려서...
<그러고보니, 이 詩集은 두번째다. 정신이 혼미하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영희, 고물상을 지나다 (0) | 2007.09.16 |
---|---|
길상호, 집 아닌 집 있다 (0) | 2007.09.14 |
박형진, 빈집 2 (0) | 2007.09.10 |
박성우, 소금벌레 (0) | 2007.09.08 |
장경린, 어디로 가는 중일까 (0) | 2007.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