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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정군칠, 아버지의 가처분 신청

by kimbook 2009. 7. 22.

아버지의 가처분 신청

 

정군칠

 

경운기 바퀴가 서너 번 헛돌고 나서야

들어서는 보리밭

바짓단을 적시던 보릿대들이 뉘어진 밭 한 귀퉁이에

낫질이 비켜간 곳이 있다

아버지는 어쩌시려구 저기다 城을 만드셨나

 

이슬이 걷히기 전 마저 베어야 할 텐데요

짚단 묶던 허리를 펴며

서투른 낫질 같은 말을 더듬거렸으나

아버지는 아지랑이처럼 끓는

마른기침 소리를 애써 낮추신다

보리농사만 농사인 것은 아니여

 

돈 몇 푼 되지 않는 농사를 놓지 않는 어버지 고집에

까끄라기 묻은 듯 심사가 껄끄럽다

 

점심을 내온 어머니는

성으로 남은 보리밭을 둘러보며

심드렁하게 말 한마디를 얹는다

또 알 품은 목숨이 있는 모양이구먼

 

보릿대 날리던 하늘

어느새 토막 난 노을이 켜켜이 쌓이고

 

시동을 끈 탈곡기가

밭은 숨 고를 새도 없이

아버지는 서둘러 보리밭을 나가자 하신다

탈탈거리는 경운기가 비탈밭을 나올 때

여백에 꾹 누른 인감도장 같은 아버지의 城에서

푸드득, 꿩 한 마리 날아오른다

 

---정군칠, 아버지의 가처분 신청, 실천문학 2009 여름호(94), 실천문학사(2009년 5월 25일)---

 

*아버지와 코스모스*

 

벼, 잠들거나 서성이고

아버지 혼자 벼를 베고 계셨다

 

논, 가운데

코스모스 하나

아버지처럼 웃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위와 같은 詩를 본 적이 있다.

 

 많은 세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

 

 아버지는 오늘도 가락시장에서

 멸치 한 상자를 사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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