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가처분 신청
정군칠
경운기 바퀴가 서너 번 헛돌고 나서야
들어서는 보리밭
바짓단을 적시던 보릿대들이 뉘어진 밭 한 귀퉁이에
낫질이 비켜간 곳이 있다
아버지는 어쩌시려구 저기다 城을 만드셨나
이슬이 걷히기 전 마저 베어야 할 텐데요
짚단 묶던 허리를 펴며
서투른 낫질 같은 말을 더듬거렸으나
아버지는 아지랑이처럼 끓는
마른기침 소리를 애써 낮추신다
보리농사만 농사인 것은 아니여
돈 몇 푼 되지 않는 농사를 놓지 않는 어버지 고집에
까끄라기 묻은 듯 심사가 껄끄럽다
점심을 내온 어머니는
성으로 남은 보리밭을 둘러보며
심드렁하게 말 한마디를 얹는다
또 알 품은 목숨이 있는 모양이구먼
보릿대 날리던 하늘
어느새 토막 난 노을이 켜켜이 쌓이고
시동을 끈 탈곡기가
밭은 숨 고를 새도 없이
아버지는 서둘러 보리밭을 나가자 하신다
탈탈거리는 경운기가 비탈밭을 나올 때
여백에 꾹 누른 인감도장 같은 아버지의 城에서
푸드득, 꿩 한 마리 날아오른다
---정군칠, 아버지의 가처분 신청, 실천문학 2009 여름호(94), 실천문학사(2009년 5월 25일)---
*아버지와 코스모스*
벼, 잠들거나 서성이고
아버지 혼자 벼를 베고 계셨다
논, 가운데
코스모스 하나
아버지처럼 웃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위와 같은 詩를 본 적이 있다.
많은 세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
아버지는 오늘도 가락시장에서
멸치 한 상자를 사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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