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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황성희, 변명

by kimbook 2009. 8. 8.

변명

 

황성희

 

 살다 보니 잊었다고  말할게.  이건 연 애편지는  아니지만

살다 보니  잊었다고, 왜 살게  됐는지 따윈 잊었다고  말할

게. 이건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고백하는 걸 용서해. 살다

보니 살게  됐어. 나도 모르게  살아졌어. 아무도 모르게 살

아 버렸어. 미안해.

 왜  살게  됐냐고  묻는다면  글쎄, 대답할 수 없겟지. 이건

연필이고 저건 책상이지만 그건  대답할 수 없겠지. 제목도

없는 이따위 책에  왜 내 사진이 실려 있는지, 그 흔한 구토

한 번 없이 어떻게 매일 아침 식사를 끝낼 수  있는지, 대답

할 수 없겠지. 저건 창문이고 지금은 저녁을 준비해야 하지

만  언제부터  여기에 차렷!  하고 서 있었는지 묻는다면 나

이트 샷 모드로는 대낮의  아기 얼굴을  촬영할 수  없다고,

이 책이  끝난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면 콩나

물국을  끓일 땐  뚜껑을  함부로 열어선  안된다고, 그리고

이유를  묻는다면 하고 싶은 말이 하나도  없는 수다쟁이가

된 이유를  묻는다면, 라디오나 들으며 식탁 옆에서 야금야

금 비역사적으로 풍화되는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느냐

고 묻는다면 글쎄, 대답할 수 없겠지.

 사실은 대답하기 싫겠지.

 

---황성희, 앨리스네 집, 민음의 시 150, 민음사(2008년 11월 11일)---

 

*가끔씩,

 '하고 싶은 말이 하나도 없는 수다쟁이'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

---59쪽, 1行,

 "신격문(新檄文)"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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