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황성희
살다 보니 잊었다고 말할게. 이건 연 애편지는 아니지만
살다 보니 잊었다고, 왜 살게 됐는지 따윈 잊었다고 말할
게. 이건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고백하는 걸 용서해. 살다
보니 살게 됐어. 나도 모르게 살아졌어. 아무도 모르게 살
아 버렸어. 미안해.
왜 살게 됐냐고 묻는다면 글쎄, 대답할 수 없겟지. 이건
연필이고 저건 책상이지만 그건 대답할 수 없겠지. 제목도
없는 이따위 책에 왜 내 사진이 실려 있는지, 그 흔한 구토
한 번 없이 어떻게 매일 아침 식사를 끝낼 수 있는지, 대답
할 수 없겠지. 저건 창문이고 지금은 저녁을 준비해야 하지
만 언제부터 여기에 차렷! 하고 서 있었는지 묻는다면 나
이트 샷 모드로는 대낮의 아기 얼굴을 촬영할 수 없다고,
이 책이 끝난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면 콩나
물국을 끓일 땐 뚜껑을 함부로 열어선 안된다고, 그리고
이유를 묻는다면 하고 싶은 말이 하나도 없는 수다쟁이가
된 이유를 묻는다면, 라디오나 들으며 식탁 옆에서 야금야
금 비역사적으로 풍화되는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느냐
고 묻는다면 글쎄, 대답할 수 없겠지.
사실은 대답하기 싫겠지.
---황성희, 앨리스네 집, 민음의 시 150, 민음사(2008년 11월 11일)---
*가끔씩,
'하고 싶은 말이 하나도 없는 수다쟁이'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
---59쪽, 1行,
"신격문(新檄文)"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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