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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류인서, 전갈

by kimbook 2009. 8. 27.

전갈

 

류인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류인서, 여우, 문학동네(2009년 3월 12일)---

 

*25년 만에

 한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조근조근한 친구의 목소리는,

 25년 동안이나

'사루비아 씨앗을 담'고 있었음을 

 나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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