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
김기택
여러번 잘리는 동안
새 일자리 알아보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이력서와 면접과 눈치로 나이를 먹는 동안
얼굴은 굴욕으로 단단해졌으니
나 이제 지하철에라도 나가 푼돈 좀 거둬보겠네
카세트 찬송가 앞세운 썬글라스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잘린 다리를 고무타이어로 시커멓게 씌우지 않아도
내 치욕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네
한 자루 사면 열 가지 덤을 끼워준다는 볼펜
너무 질겨 펑크 안 난다는 스타킹
아무리 씹어도 단물 안 빠진다는 껌이나 팔아보겠네
팔다가 팔다가 안되면 미련 없이 걷어치우고
잠시 빌린 몸통을 저금통처럼 째고 동전 받으러 다니겠네
껌팔이나 구걸이 직업이 된다 한들
어떤 치욕이 이 단단한 갑각을 뚫겠는가
조금만 익숙해지면 지하철도 목욕탕 같아서
남들 앞에서 다 벗고 다녀도 다 입은 것 같을 것이네
갈비뼈가 무늬목처럼 선명하고
아랫도리가 징처럼 울면서 덜렁거리는
이 치욕을 자네도 한번 입어보게
잘 맞지 않으면 팔목과 발목 좀 잘라내면 될 거야
아무려면 다 벗은 것보다 못하기야 하겠는가
요즘엔 정형외과라는 수선집이 있어서
몸도 싸이즈가 맞지 않으면 척척 고쳐주는 세상 아닌가
이깟 수선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옷이 안 맞는다고 자살하는 것보단 백번 나을 거야
다만 불을 조심하게나
왜 느닷없이 울컥 치밀어나오는 불덩이 있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건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태우고 보는 불,
시너 한통 라이터 하나로
600년 남대문을 하룻저녁에 태워먹은 그 불 말이야
불에 덴 저 조개들 좀 보게
아무리 단단한 갑각으로 온몸을 껴입고 있어도
뜨거우니 저절로 쩍쩍 벌어지지 않는가
발기된 젓가락과 이빨들이 와서 함부로 속살을 건드려도
강제로 벗겨진 팬티처럼 다소곳이 있지 않는가
앞으로 쓸 곳은 얼마든지 있을테니
일자리에 괴로움을 너무 많이 쓰지는 말게
치욕이야말로 절대로 잘리지 않는 안전한 자리라네
---김기택, 구직,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통권 145호), 창비((2009년 9월 1일)---
*정말 좋은
'안전한 자리'입니다.
임응식, 구직(求職), 1953년.
이 사진은 어디선가 퍼 온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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