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의 가능성
안현미
스물두살 때 나는 머리를 깎겠다고 전라도 장수에 간 적 있다 그곳
엔 아주 아름다운 여승이 있었고 나와 함께 그곳에 머물던 경상도 아
가씨는 훗날 운문사 강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돌아왔다 돌아와 한동안
무참함을 앓았다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는 중이었는데 내겐 거울
도 지도도 없었고 눈물뿐이었다 나는 나를 꺼내놓고 나를 벗고 싶었
으나 끝내, 나는 나를 벗을 수 없었고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고 한
는 중이었는데 나는 감히 요절을 생각했으니 죄업은 무거웠으나 경기
장 밖 미루나무는 무심으로 푸르렀고 그 무심함을 향해 새떼들이 로
켓처럼 솟아올랐다 다른 차원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업은 무거웠으
나 그런 날이 있었다
---안현미,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통권 151호), 창비(2011년 3월 1일)---
*나도 한때 가능성이 있다고들 했다.
어쨌든 '푸르렀고 무거웠던' 그런 날도 있었다.
지금도, 준비된 내비게이션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