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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안현미, 어떤 삶의 가능성

by kimbook 2011. 3. 3.

  어떤 삶의 가능성

 

  안현미

 

  스물두살 때 나는 머리를  깎겠다고  전라도  장수에 간 적 있다 그곳

엔 아주  아름다운 여승이 있었고 나와 함께 그곳에  머물던 경상도 아

가씨는 훗날 운문사 강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돌아왔다  돌아와 한동안

무참함을 앓았다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는 중이었는데 내겐 거울

도 지도도  없었고  눈물뿐이었다 나는  나를 꺼내놓고 나를 벗고 싶었

으나 끝내, 나는 나를 벗을 수 없었고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고 한

는 중이었는데 나는 감히 요절을 생각했으니  죄업은 무거웠으나 경기

장 밖  미루나무는  무심으로  푸르렀고 그 무심함을 향해 새떼들이 로

켓처럼  솟아올랐다 다른 차원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업은 무거웠으

나 그런 날이 있었다

 

---안현미,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통권 151호), 창비(2011년 3월 1일)---

 

*나도 한때 가능성이 있다고들 했다.

 

 어쨌든 '푸르렀고 무거웠던' 그런 날도 있었다.

 

 지금도, 준비된 내비게이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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