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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유형진, 어린 나무

by kimbook 2011. 11. 29.

     어린 나무

 

     유형진

 

     나 어릴 때 창문 아래 살던 작은 나무야

     나는 오늘 너를 생각해

     너는 서쪽 창가에 언제나 있었지

     하늘이 조금씩 붉어질 때 너는

     내가 어린 나무란게 참 좋아, 하고 말했지

     난 그 말을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어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엄마  아빠는 밭에 나가고 너는 내

    창문 아래 서서 하늘에게 모두의 안부를 길어다 주었지 찐

    고구마를  부엌 쥐가  먹어 버린 것과  엄마의 커피를 몰래

    타  먹다가 프림을  다 엎지른  일과 오빠의 딱지를 우물에

    빠트린 것과 택이네 돼지가 새끼를 낳다가 죽은 일과 구슬

    치기 하다가 여덟 개가 시궁창으로 빠진 일과 우박이 갑자

    기 쏟아져서 아욱 잎이 찢어진 일들……

 

     오늘은 너를 생각해

     작은 잎새랑 그 잎새를 흔들던 바람이랑은 이제 어디로 떠났을까?

     네 잎을 먹으며 점점 뚱뚱해지던 애벌레도

     나비가 되어 돌아오진 알겠지

 

     서쪽 창가의 어린 나무야

     나는 오늘 너를 생각해

     하늘은 그때처럼 붉어지지만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아

     오지 않는다는 건 기다리지 말라는 얘기

     기다리면서 어린 나무는 늙어 가니까

 

   ---유형진,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민음의 시 173, 민음사(3011년 3월 8일)---

 

   *마당가 구부러진 밤나무도,

    큰길가 돌배나무도,

    흐드러지던 산벚꽃나무도, 개살구도

    나처럼, 늙었더라.

 

    나를 기다리지 마라.